EIP의 흐름, 그중에서도 매년 얼마나 많은 신규 저자(author)가 제안에 참여해왔는지는 이더리움이 그간 얼마나 탈중앙적으로 운영되어 왔는지를 가늠하는 좋은 지표 중 하나이다. 탈중앙성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자발적으로 쉽게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하는데, 신규 저자 참여의 비율은 그 환경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참고해야할 부분은, ERC와 ERC를 제외한 EIP(즉, non-ERC EIP로 Core, Networking, Interface, Meta, Informational, 그리고 RIP 등의 범주)는 성격이 꽤 다르다는 점이다. non-ERC EIP는 네트워크 로우레벨에 대한 이해와 그간의 표준 역사 및 컨텍스트를 모두 따라잡아야 제안이 가능한 영역이라 진입장벽이 높은 반면, 애플리케이션단에서 구현하는 표준인 ERC는 상대적으로 쉽게 누구나 자기 필요에 맞춰 제안을 던질 수 있다.

실제로 시장이 좋았던 2018년(ERC 64건)과 2022년(ERC 122건)을 정점으로 ERC 제안이 폭증했고, 2015년도와 2016년도를 제외하고 이 시기동안 신규 EIP 저자의 비율 역시 인접한 연도들에 비해 가장 높게 나타났다. non-ERC EIP 역시 ERC만큼은 아니더라도 꾸준히 신규 참여 비중이 40%대 이상을 유지해왔다. 시장 사이클과 무관하게 매년 일정 수준 이상의 새로운 얼굴이 코어 단의 논의에 유입되어 왔다는 점은, 외부 기여자가 이더리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파이프라인이 꾸준히 작동해왔음을 시사한다.

하지만 2026년의 수치는 이 흐름과 분명히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아직 반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이미 55건(ERC 15건, non-ERC EIP 40건)의 EIP가 쌓여 모수 자체는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신규 저자의 비율은 ERC의 경우 40.0%, non-ERC 27.5%로 과거 모든 연도 대비 현저히 낮다. ERC의 경우 2015년 이후 한 번도 7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고, non-ERC EIP 역시 가장 낮았던 2019년의 34.1%보다 더 낮은 수준까지 내려왔다. 단순히 제안 수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제안하는 사람의 구성 자체가 좁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른 변화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변화가 우려스러운 이유는 2026년이 마침 이더리움 네트워크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연구자들의 대거 이탈이 발생한 해이기 때문이다. non-ERC EIP의 절대 숫자가 평년 수준에 못 미치는 것은 물론, 핵심 네트워크 관련 제안이 EF(이더리움 재단) 구성원이나 EF와 가까운 소수의 핵심 기여자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함께 고려하면, 신규 저자 유입의 감소는 단순한 사이클상의 둔화로 해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Source: Ethereum Blog
다만, 이러한 변화의 배경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EF는 2026년 들어 재단의 역할과 방향에 대해 보다 뚜렷한 스콥을 제시하고 그에 맞춰 조직을 재편해왔다. 6월 23일 발표된 새 구조에서는 protocol, access, user, community, institutional의 5개 cluster로 EF의 일을 재정의하면서, 동시에 전체 인원의 약 20%에 해당하는 54명과 결별했다. 재단의 스콥이 좁아지는 만큼 그 역할이 자연스럽게 외부로 이동할 것이라는 논리이며, 이더리움이 진정한 “중립적인 공개 인프라(neutral public infrastructure)”를 지향한다면 방향성 자체는 합리적이라 보인다.
문제는 그 전환기에 신규 저자 유입의 비율이 함께 내려앉고 있다는 점이다. 재단의 스콥이 좁아지는 것은 의도된 변화지만, 그 빈자리를 메워야 할 외부 기여자의 유입이 함께 약해지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더 본질적으로는, EF의 재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고민은 영향력(power)의 이동 그 자체보다 문서화되지 않는 암묵지(tacit knowledge)의 이전 문제다. 과거에 어떤 설계가 왜 거부가 됐는지, 특정 클라이언트 팀이 어떤 제약 사항(constraint)을 안고 있는지, 어떤 연구자가 어떤 문제를 오래 들여다봐 왔는지, 이론상 좋아 보이는 변경이 실제 포크 상황(fork coordination)에서는 왜 위험한지, ACD에서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모두가 공유하는 합의 형성 방식은 무엇이 있는 지, 어떤 EIP가 stagnant인지 혹은 사실상 거절이 된 건지(abandoned) 아니면 부활 가능성이 남아있는지 등은 모두 명문화되어 나타나지는 않은 그간의 “맥락(context)”이다. 신규 저자의 유입이 줄어든다는 것은 결국 이 맥락에 새롭게 접근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앞으로 지켜봐야 할 것은 두 가지다. EF를 떠난 연구자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더리움의 코어 업데이트에 계속 기여하는지, 그리고 재단과 재단 외 스핀오프 집단이 각자의 철학에 일치된 신규 연구자들을 어떻게 다시 끌어들이는지가 그것이다. 2026년 후반기에 신규 저자의 비율이 다시 회복되는지, 아니면 지금의 수치가 추세로 굳어지는지는 이더리움의 탈중앙성이 구조 전환기에도 유지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가장 직접적인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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