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아직 안열린 시장, 온체인 무역금융
토큰화는 국채, 머니마켓펀드, 사모신용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온체인 RWA 시장 규모는 2022년 약 29억 달러에서 2026년 300억 달러를 넘어서며, 3년여 만에 10배 이상 성장했다. 이 중 미국 국채가 40% 안팎으로 가장 크고, 원자재가 10%대, 사모 신용(약 20%), 주식 (약 5%)이 뒤를 잇는다.
반면 무역채권(trade receivables)이 차지하는 비중은 사실상 0에 가깝다. 시장성이 부족해서 외면받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
- 세계 상품과 교역 서비스은 연간 33조 달러로 움직인다.
- 무역금융은 국경 간 교역의 최대 90%를 뒷받침하고 있다.
- 매출채권 금융 시장만 해도 연간 3조~3조,5000억 달러 규모이며, 미국 기업이 보유한 매출채권 잔액은 약 6조 달러로 추산된다.
무역채권은 자산군으로서의 프로파일도 뚜렷하다. 만기와 지급 금액이 정해진 단기 채권으로, 실제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만큼 회전이 빠르고 지급 의무가 명확해 현금흐름을 예측하기 쉽다. 무엇보다 기업의 매출과 현금 유입 사이를 잇는 주요 운전자본 자산이다.
즉 가장 큰 실물 금융자산 중 하나이자 기업의 운전자본 효율을 좌우하는 시장이지만, 무역채권은 지금까지 온체인화의 흐름에서 비켜나 있었다.
2. 앞선 무역금융 블록체인은 왜 무너졌나
무역금융에 블록체인을 적용하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7년부터 2022년까지 대형 은행과 물류기업은 이 문제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왔고, 일부 성과도 존재했다.
- 위트레이드(we.trade): 12개 은행이 참여한 하이퍼렛져 패브릭(Hyperledger Fabric) 기반 플랫폼이다. SME의 오픈어카운트 무역금융을 자동화해, 인도 확인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컨트랙트가 결제를 자동 실행하는 구조다. 2019년 상용 거래를 시작하고 회원 은행 15곳, 16개국까지 확장했지만 2022년 청산했다.
- 마르코 폴로(Marco Polo): 30~45개 은행이 참여한 콜다(Corda) 기반 플랫폼으로, 매출채권 할인과 지급 확약을 제공했다. 2020년 실서비스에 진입해 실제 채권 할인 거래를 처리했지만, 2023년 파산했다.
- 콘투어(Contour): ANZ, BNP파리바, HSBC, 스탠다드차타드 등이 참여해 신용장 디지털화에 집중했다. 2020년 운영을 시작했지만, 월 처리량이 60~70건에 머문 채 2023년 폐쇄됐다.
- 트레이드렌즈(TradeLens): 하이퍼렛져 패브릭을 통해 IBM과 머스크가 컨테이너 무역 데이터를 디지털화한 플랫폼으로, 2022년 종료됐다.
앞선 시도들에서 실패 자체보다 그 원인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좁혀진다.
- 폐쇄형 네트워크: 기존 컨소시엄은 저마다 별도의 프라이빗 체인 위에 독자 규칙과 계약을 세웠다. 체인끼리 서로 통신하지 못해, 기업은 거래처가 속한 네트워크마다 따로 가입해야 했다. 컴플라이언스와 규칙도 체인이 아니라 각 서비스에 개별적으로 구현돼, 참여자가 늘수록 통합 비용이 커졌다.
- 커스텀 개발 비용: 기존 플랫폼은 권한 관리, 이전 제한, 수탁 연동을 매번 바닥부터 새로 구축했다. 거래량이 임계치에 못 미치는 동안에도 개발과 유지 비용은 계속 발생했다.
- 다자 참여를 전제로 한 구조: 이전 시도들은 다수 은행과 기업이 동시에 참여해야 효용이 생기는 컨소시엄 모델이었다. 하지만 참여 기관마다 규제 기준과 내부 시스템, 이해관계가 달라 의사결정과 연동에 시간이 걸렸다. 충분한 거래량이 확보되기 전에도 다수 기관의 합의와 운영비가 요구됐고, 결국 네트워크 효과가 형성되기 전에 비용 부담이 커졌다.
결국 앞선 시도들의 실패에는 기술적 선택과 사업 구조가 함께 관련돼 있었다. 인프라는 분절됐고, 네트워크 효과가 형성될 만큼 거래가 모이지 않았다. 이에 필요한 건, 또 하나의 폐쇄형 플랫폼이 아니라 공유 인프라 위에서 반복적으로 사용 가능한 표준 금융 프리미티브다.
3. 인젝티브, 포스코인터내셔널과 LG CNS와의 PoC 개시

온체인 무역금융의 공백에 인젝티브(Injective)는 최근 유의미한 이니셔티브를 선보였다. 포스코인터내셔널과 LG CNS가 인젝티브를 기반 네트워크로 채택해, 국제 무역에서 발생한 매출채권의 전체 생애주기를 온체인에서 처리하는 PoC다.
-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철강, 에너지, 식량, 소재 등 다양한 사업 영역에 걸친 한국 최대 종합상사다. 이번 PoC에 실제 무역 데이터와 거래 흐름을 제공한다.
- LG CNS는 무역금융 워크플로우를 설계한다. 한국 220여 개 지방자치단체의 디지털화폐 인프라를 개발했으며, 한국은행 CBDC 파일럿과 미래에셋증권의 토큰증권 인프라 구축에도 참여한 이력이 있다.
- 인젝티브는 매출채권 발행 이후의 관리와 정산을 프로토콜 차원에서 처리하는 체인을 제공한다.
PoC는 공유 원장, 허가형 실물자산, 에이전틱 AI를 하나의 무역금융 워크플로우로 통합한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매출채권을 인젝티브 상에 발행하고, 참여 기관은 공유원장에서 매출채권의 소유자와 이전 이력, 정산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기존 무역금융은 판매자와 구매자, 은행, 물류사, 보험사, 해외 자회사가 같은 거래를 각자 장부에 기록한다. 때문에 정산 전 서류 검증과 장부 대사에 시간이 지체되고, 그동안 판매자의 운전자본은 선적과 대금 회수 사이에 묶인다. 공유 원장은 중복 기록과 대사 절차를 줄여 모든 참여자가 자산의 생애주기 내내 같은 상태를 확인하도록 한다.
LG CNS의 에이전틱 AI는 신용장과 무역 서류를 검토해 누락과 조건 불일치를 사전에 식별한다. 수작업 중심의 서류 검토를 자동화함으로써 매출채권 처리와 대금 회수를 앞당기는 솔루션이다.
컴플라이언스는 자산 자체에 내장된다. 승인 보유자 요건, 관할권 제한, 이전 통제, 자산 동결, 발행/상환 권한을 인젝티브의 허가형(Permissions) 프레임워크에 설정하는 구조다. 자산이 이전될 때 해당 규칙도 함께 적용되며, 기관은 이러한 기능을 통합한 발행 플랫폼인 인젝티브 민트(Injective Mint)로 자산을 발행하고 관리한다.
4. 왜 인젝티브이고, 어떻게 실패를 피하는가
인젝티브의 PoC는 과거 무역금융 블록체인이 막혀왔던 지점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준다. 앞서 짚은 세 가지 원인에 각각 대응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분절된 폐쇄형 네트워크 → 퍼블릭 체인 위 허가형 자산
PoC는 퍼블릭 체인 위에 허가형 자산을 발행한다. 규제 요건은 인젝티브의 허가형 프레임워크를 통해 자산에 직접 설정된다. 통제는 자산을 따라가고 기반 인프라는 공유되기 때문에, 참여자마다 별도의 폐쇄형 네트워크를 구축하지 않고도 같은 인프라 위에서 규칙이 다른 자산을 함께 운용할 수 있다.
둘째, 반복되는 커스텀 개발 → 표준화된 단일 발행 워크플로우
이번 구조에서는 권한 설정과 이전 통제, 자산 관리 기능을 인젝티브 민트의 단일 발행 워크플로우에서 처리한다. 발행할 때마다 커스텀 스마트 컨트랙트와 운영 워크플로우를 새로 만들 필요가 없어, 신규 자산을 올릴 때마다 반복되던 구축 비용과 개발 시간이 줄어든다.
셋째, 다자 참여가 전제되는 구조 → 단일 기업의 실거래에서 시작
포스코인터내셔널의 실제 무역 흐름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타개할 여지가 있다. 여러 은행과 기업을 먼저 모으지 않아도 단일 기업 그룹의 해외 자회사와 거래상대방 사이에서 초기 거래량과 유즈케이스를 확보할 수 있다. 컨소시엄 모델의 콜드 스타트 문제를 우회하는 접근이다.
결국 세 가지 대안은 컴플라이언스와 발행, 관리 기능이 프로토콜에 이미 내장돼 있어 가능해진다. 대개 범용 블록체인에서 해당 기능은 자산마다 별도의 스마트 컨트랙트로 구현해야 한다.
반면, 인젝티브는 허가형 프레임워크와 인젝티브 민트 등의 모듈을 통해 규제 자산이 요구하는 보유 자격, 관할권 제한, 발행/상환 권한이 체인 자체에 마련돼 있다. 여기에 서브초 단위의 블록 생성과 즉시 완결성은 실제 대금 정산을 지연 없이 마무리한다. 규제와 정산이라는 두 축을 한 체인에서 함께 소화한다는 점이 범용 체인과의 차이다.
5. 출발점과 남은 과제
출발점을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잡은 배경도 설득력을 만든다. 포스코인터내셔널은 2025년 매출 약 32조 4,000억 원(약 227억 달러)의 한국 최대 종합상사로, 전신 대우(Daewoo) 시절부터 반세기 동안 글로벌 무역 네트워크를 다져왔다.
한 기업의 기존 무역 흐름만으로도 유의미한 거래량이 확보되므로, 기존 컨소시엄이 외부 참여자를 모아 만들려다 부진했었던 규모를 대형 상사 한 곳에서 기대해볼 수 있다.
물론 아직은 시작 단계다. 실제로 매출채권을 유동화해 외부 투자자에게 유통하고, 이를 실제 자금조달로 연결하는 실증이 향후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국채와 사모신용, 레포 거래로 이어져온 온체인 금융의 흐름에서 무역금융은 아직 비어 있는 시장이며, 그만큼 시장 전체의 확장 여지도 크다. 이번 실증에서 어떤 결과를 내놓을지 지켜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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