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장의 흐름을 따라 움직여온 크립토 자본
크립토의 성장은 특정 투자자군 하나가 만들어온 결과는 아니었다. 리테일 투자자들을 비롯해 크립토 네이티브 VC, 그리고 종합형(Generalist) VC, 성장투자(Growth), 사모펀드(PE), 전통 금융기관(TradFi), 기업(Corporate) 및 CVC, 국부펀드 등 다양한 자본이 시장 상황에 따라 유입됐다. 이들의 투자금은 프로젝트와 기업을 거쳐 개발자, 인프라, 거래소, 시장조성자와 생태계 전반으로 흘러가며 시장의 자금조달 기반을 형성해왔다.
때문에 누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크립토에 자본을 공급하는지는 시장의 관심과 위험선호를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proxy)로 볼 수 있다.


제공된 데이터를 보면 이러한 흐름은 시장 사이클과 비교적 선명하게 맞물린다. 귀속 추정 투자액(Attributed Capital)은 2021년 약 $25B로 정점을 기록한 뒤 2022~2023년 크게 감소했고, 2024년부터 회복해 RWA와 스테이블코인이 주목받은 2025년에는 다시 $15B 이상까지 반등했다. 2026년 YTD에는 약 $10B 수준으로 다시 낮아졌다.*
다만 올해는 투자 규모보다 누가 새롭게 돈을 공급하고 있는가에서 더 흥미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신규 투자 주체의 중심이 전통 금융기관과 기업 쪽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그래프는 DeFiLlama의 Raises 데이터 중 공개된 투자금액과 투자자가 확인되는 투자 라운드만 포함하며, 리테일 대상의 퍼블릭 투자 및 비투자자 성격의 자금조달은 제외하였다.
2. 새로이 확대되는 자본 공급자는 전통 금융기관과 기업

2026년 YTD 새롭게 등장한 기관 투자자는 17곳으로, 이미 2025년 전체 15곳 수준을 넘어섰다. 크립토 네이티브 투자자가 2025년 36곳에서 2026년 YTD 4곳으로 줄어든 것과는 매우 대비가 되는 부분이다.
기관 내부의 구성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신규 기관 투자자 중 종합형 VC / 성장투자 / 사모펀드의 비중은 2025년 53.3%에서 17.6%로 낮아졌다. 반대로 전통 금융 / 자산운용 / 시장 인프라가 47.1%, 기업 / CVC가 29.4%를 차지한다. 둘을 합치면 76.5%로, 2025년 40.0%에서 불과 1년 사이 크게 높아졌다.
필자는 이것이 단순한 투자자 명단의 변화 이상일 수 있다고 본다. 전통 금융기관과 기업은 투자와 동시에 해당 기업의 고객, 사업 파트너 혹은 인프라 참여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투자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자본시장연구원(KCMI)은 블랙록(BlackRock)의 써클(Circle) 투자와 금융기관들의 디지털 애셋(Digital Asset), 파이어블록스(Fireblocks), 시큐리타이즈(Securitize) 투자 등을 단순한 재무적 수익을 넘어, 피투자사의 기술을 자사 서비스에 접목하고 차세대 금융 인프라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로 해석한다.
실제 투자 사례에서도 비슷한 관계가 나타난다. 디지털 애셋(Digital Asset)은 2025년 $135M 라운드를 직접 전략적 투자 라운드라고 명시했고, 트레이드웹(Tradeweb), BNP 파리바(BNP Paribas), DTCC, 골드만삭스(Goldman Sachs) 등 전통 금융기관과 폴리체인(Polychain) 등 크립토 네이티브 투자자가 함께 참여했다. Fnality 역시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 씨티(Citi), 트레이드웹, UBS, 골드만삭스, DTCC 등 다수 금융기관을 주주로 두면서 이들이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기관 간 결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더 넓게 보면 은행의 투자처 역시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리플(Ripple), CB 인사이트(CB Insights), 그리고 UK Centre for Blockchain Technologies가 함께한 조사에 따르면 글로벌 은행들은 2020~2024년 345건의 blockchain 투자에 참여했고, 이 가운데 33건은 $100M 이상의 대형 투자 라운드였다. 주요 관심 영역도 기관 거래, 토큰화 인프라, 결제, 디지털자산 수탁 등 본업과 직접 맞닿은 분야에 집중됐다.
즉 자본의 무게중심이 단순히 “어떤 크립토 기업의 가치가 앞으로 오를 것인가”에서, 점차 “어떤 크립토 인프라가 우리의 사업에 필요할 것인가”라는 질문까지 확장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이렇게 확대된 기관 자본은 기존 크립토 시장 전체까지 흘러올까
필자는 그 효과가 과거보다 훨씬 선별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과거에는 시장 자체의 성장에 베팅하는 재무적 투자가 상대적으로 많았고, 풍부한 리테일 유동성이 기업가치와 투자 회수를 받쳐주면서 프로젝트뿐 아니라 인프라, 시장조성자, 미디어와 마케팅 등 다양한 생태계 참여자가 함께 수혜를 볼 수 있었다.
반면 지금은 자본이 AI와 주식 등 크립토 밖으로도 분산되고 있을 뿐 아니라, 크립토 내부에서도 실제 수요가 있거나 반드시 필요한 인프라를 중심으로 투자가 선별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따라서 기관의 투자 목적과 최종 고객이 결제, 수탁, 지급, 토큰화 같은 금융업 안에 머문다면, 기관향 크립토 시장이 성장하더라도 과거와 같은 광범위한 낙수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만 기관과 대형 금융, 결제기업이 필요한 역량을 모두 처음부터 내부에서 구축하는 것은 아니다. 스트라이프(Stripe)는 2025년 스테이블코인 인프라 기업 브릿지(Bridge)를 인수한 뒤 이를 자체 결제 및 스테이블코인 발행 인프라로 통합했고, 2026년에는 마스터카드(Mastercard)가 스테이블코인 결제 인프라 기업 BVNK를 최대 $1.8B에 인수하며 기존 결제망과 온체인 자금이동을 직접 연결하기 시작했다. 블랙록 역시 시큐리타이즈의 $47M 전략적 투자 라운드를 주도한 동시에, 자사 첫 토큰화 펀드 BUIDL의 발행 및 토큰화 인프라를 시큐리타이즈에 맡겼고 BUIDL은 이후 $1B 이상의 운용자산을 확보했다. 즉 기관화가 진행될수록 모든 기능이 전통 금융사 내부로 흡수되기보다, 검증된 크립토 인프라를 투자, 혹은 인수를 하거나 파트너십을 통해 가져와 기존 금융상품과 유통망에 결합하는 방식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규제가 구체화될수록 이러한 수요는 더 명확해질 수 있다. 특히 한국의 경우, 법인의 가상자산시장 참여가 확대될수록 수탁, 내부통제, 거래관리 등 실제 운영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결국 기관이 직접 구축할 영역과 외부 전문업체에서 조달할 영역이 나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 플레이어가 기대해야 할 것은 기관 자본의 유입에 따른 막연하고 간접적인 낙수보다는 자신이 이미 가진 역량을 기관이 “지금 필요로 하는 실제 구매 항목”으로 바꾸는 것에 가깝다. 키 관리, 밸리데이터 및 노드 운영, 보안, 거래 모니터링, 온체인 데이터 및 레포팅처럼 기존 크립토 업체가 이미 전문성을 가진 영역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향후에는 기관 자본이 시장 전체를 다시 부양하기보다는 기관이 필요로 하지만 직접 구축하지 않을 영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기업간 거래 시장이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더 높다. 기존 플레이어에게 중요한 질문도 결국 하나다. 우리가 이미 잘하는 것 중 기관이 실제로 돈을 내고 살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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