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두가 같은 사용자를 바라보던 시장
과거 크립토 시장의 고객은 비교적 명확했다. L1과 거래소, 지갑과 디파이(DeFi) 프로토콜은 모두 새로운 리테일 사용자를 온체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했고, 각 생태계의 성장은 사용자와 유동성, 토큰 가격이라는 비슷한 지표로 평가됐다. 서로 경쟁하면서도 결국 같은 시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 인물의 메시지가 업계 전체의 방향으로 번지기도 쉬웠다.
2014년 Mt. Gox가 무너졌을 때 코인베이스(Coinbase)와 비트스탬프(Bitstamp), BTC 차이나(BTC China) 등 주요 사업자들은 이를 비트코인의 실패와 분리하고, 고객 자산을 다루는 사업자가 갖춰야 할 보안과 준비금, 운영 원칙을 공동으로 제시했다. 위기 이후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뿐 아니라, 업계가 어떤 기준으로 다시 세워져야 하는지를 함께 설명한 것이다. 당시에는 기업의 이해관계가 달라도 비트코인의 신뢰와 사용자 기반을 회복한다는 공통 목표가 존재했다.
2018년 하락장에서 CZ가 내세운 ‘BUIDL’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는 ICO 프로젝트의 실행 실패와 거래소 보안 사고, 규제 불확실성, 업계 내부의 분열을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동시에, 가격 대신 제품과 인프라를 진척의 기준으로 제시했다. 바이낸스(Binance)의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메시지였지만, 당시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같은 리테일 시장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업계 전체의 구호로 확장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바이낸스는 랩스와 아카데미(Academy), 리서치(Research), SAFU, 자체 체인처럼 메시지에 대응하는 실제 결과물을 함께 보여줬다는 점이 중요했다.
도권(Do Kwon)은 이보다 위험하지만 더 극단적인 사례다. 테라(Terra)는 탈중앙화된 화폐와 결제 생태계라는 복잡한 비전을 UST와 앵커(Anchor)의 최대 20% 수익률이라는 이해하기 쉬운 제안으로 압축했다. 이 구조는 결국 지속 가능하지 않았고, 테라폼 랩스(Terraform Labs)와 도권은 UST의 안정성과 실제 사용에 관해 투자자를 오도한 혐의로 SEC의 제재를 받았다. 그럼에도 한동안 개발자와 자본, 리테일 사용자를 같은 내러티브 아래 정렬했던 힘은 분명했다.
2. ‘기관향’이라는 이름 아래 흩어진 이해관계
현재는 상황이 다르다. 리테일 시장의 성장성이 둔화되자 거의 모든 프로토콜과 기업이 기관을 새로운 고객으로 이야기하지만, 사실 기관은 하나의 고객군이 아니다. 자산운용사는 투자 가능한 상품과 유동성을 원하고, 은행은 결제와 담보 이동의 효율성을 보며, 기업은 자금 관리와 해외 송금을, 수탁사는 통제와 규제 준수를 우선한다. 같은 ‘기관 채택’이라는 표현 아래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증권, 커스터디, 거래 인프라, 결제망처럼 전혀 다른 사업이 함께 묶여 있다.
이 때문에 기관이라는 단어는 구체적인 고객을 가리키기보다, 성숙함을 증명하기 위한 만능 수식어에 가까워졌다. L1은 기관용 체인을 말하고, 디파이는 기관용 상품을 만들며, 거래소와 커스터디 기업도 자신이 전통 금융과 온체인을 연결하는 관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이 상대하는 기관도, 해결하려는 문제도, 수익이 발생하는 지점도 서로 다르다. 모두가 기관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함께 키우는 하나의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과거에는 한 생태계의 사용자 증가와 토큰 가격 상승이 다른 프로젝트에도 신규 자본과 관심을 가져왔다. 반면 지금은 한 은행의 토큰화 실험이나 한 운용사의 상품 출시가 크립토 시장 전반의 수요로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기관의 프로젝트는 각자의 규제와 고객, 업무 흐름 안에서 완결되는 경우가 많으며, 다른 온체인 서비스나 리테일 사용자에게까지 효용이 전파되지 않을 수도 있다. 시장의 이해관계가 분산된 만큼, 어느 한 창업자가 전체 산업을 대표해 다음 방향을 말하기도 어려워졌다.
3. 공통의 새로운 내러티브보다는 실행
그렇다면 시장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을 촉매는 새로운 카리스마적인 리더의 등장 따위보다는, 서로 다른 참여자들이 만들어낸 수요가 연결되는 순간에 가까울 수 있다. 그렇다고 모두가 다시 같은 고객이나 섹터를 바라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트레이딩과 결제, 대출과 예측시장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명확한 사용자를 확보하고, 시장 상황과 무관하게 반복적인 거래와 비용 지불을 만들어내는 플레이어들이 먼저 필요하다.
최근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키운 프로젝트들도 거대한 산업의 미래를 앞세우기보다 구체적인 수요에서 출발했다. 하이퍼리퀴드(Hyperliquid)는 실제 온체인 트레이더의 경험을 개선하는 데 집중했고, 폴리마켓(Polymarket)은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을 거래 가능한 시장으로 만들었다. 아베(Aave)와 몰포(Morpho) 역시 ‘금융의 미래’라는 추상적인 비전보다 차입과 대출이라는 오래된 수요를 중심으로 제품과 유동성을 확장해왔다. 이들이 상대하는 사용자는 서로 다르지만, 가격 상승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만의 반복적인 사용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은 같다.
시장 전체의 촉매는 이 가운데 어느 하나가 유일한 승자가 되는 데서 나오기보다, 각자가 만든 자산과 유동성, 사용자가 서로의 제품으로 이동하기 시작할 때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거래를 위해 유입된 자산이 대출과 결제에 활용되고, 한 프로토콜이 확보한 유동성이 다른 지갑과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유통되며, 기관이 공급한 자산도 여러 서비스의 담보와 상품으로 사용되는 구조다. 이러한 연결이 없다면 기관 채택은 개별 금융회사의 내부 효율화에 머물고, 리테일 서비스 역시 제한된 투기 수요를 반복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좋게 보면 지금의 분산은 크립토가 하나의 독립된 투기 시장을 넘어, 서로 다른 산업의 기저 인프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곡점일 수 있다. 시장이 성숙할수록 참여자들은 더 이상 하나의 구호나 토큰 가격만으로 함께 움직이지 않고, 각자의 고객과 규제, 수익 구조에 따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블록체인을 활용하게 된다. 따라서 지금은 ‘기관 채택’이나 ‘토큰화’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관심과 이상적인 비전보다, 누가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있으며 그 수요가 다른 서비스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더 면밀히 살펴봐야 할 때다.
이는 업계 플레이어들이 각자 향후 무엇에 집중하고 누구와 파트너십을 맺어야 하는지에도 시사점을 준다. 어느 섹터가 다음 사이클의 승자가 될지를 미리 결정하기보다, 명확한 고객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 제품을 구축하면서 자신의 기술과 유통, 자본과 운영 역량을 다른 플레이어와 연결할 수 있는 팀을 찾아야 한다. 새로운 리더십 역시 모두에게 하나의 미래를 설파하는 사람보다, 분산된 수요 사이에서 실질적인 협업을 만들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여러 플레이어들로부터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특정 섹터의 유망함을 가려내기보다, 어느 영역에서든 실행력으로 수요를 증명하는 팀을 중심으로 대응해야 할 만큼 시장이 성숙한 단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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