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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2015년에 런칭한 이더리움은 올해로 11년차가 된 네트워크다. 그 사이 이더리움은 더 머지(The Merge) 하드포크를 통해 작업증명(PoW)에서 지분증명(PoS)으로 합의 방식을 바꿨고, 이후에도 샤펠라(Shapella), 덴쿤(Dencun), 펙트라(Pectra), 푸사카(Fusaka)를 통해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이더리움은 늘 무언가 바뀌고 있는 체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더리움에 투자하거나, 네트워크에 무언가를 만들기 전에 앞으로 이더리움이 어떤 모습으로 바뀌려 하는지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2025년 7월, 이더리움이 막 열 살이 된 다음 날 이더리움 재단의 연구자 저스틴 드레이크(Justin Drake)는 린 이더리움(lean Ethereum) 비전을 공개했다. 린(lean)은 군살을 뺀다는 뜻이다. 린 이더리움은 다양한 곳에 흩어진 이더리움의 연구들과 방향성 중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덜어내 하나의 비전으로 제시하는 로드맵이다. 10년 된 집에 비유하자면, 외관은 그대로지만 내부 기초와 배관, 전선과 같은 집을 구성하는 기반을 바꾸는 공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전은 2026년 2월, 스트로맵(Strawmap)이라는 문서로 구체화됐다. 이름 그대로 초안(strawman)이기에 이 로드맵은 확정된 계획이 아니라, 커뮤니티 논의에 따라 계속 수정되는 살아있는 문서다. 실제로 지난 6월 26일에도 새 버전으로 업데이트 되었다. 최신 버전의 스트로맵은 2026년 하반기 예정된 글램스터담(Glamsterdam)부터 2029년까지 이어지는 하드포크들과, 그 모든 업그레이드가 최종적으로 향하는 다섯 개의 목적지를 북극성(north star)이라는 이름으로 제시한다.
이 글은 이 다섯 개의 북극성을 따라 약 4년 뒤, 2030년의 이더리움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본다.
Fast L1: 더더욱 빨라지는 이더리움 메인넷
첫 번째 북극성은 이더리움 L1 자체의 속도다. 지금의 이더리움에서는 거래가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되는 상태, 즉 최종성(finality)을 얻기까지는 대략 15분이 걸린다. 약 88만 개의 밸리데이터가 모든 블록에 대해 동시에 투표하면 그 서명을 모아서 처리하는 부담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이더리움은 밸리데이터를 32개 그룹으로 나눠 순서대로 투표시키고, 이 과정을 두 바퀴 돌아야 확정을 내린다.
린 합의(lean consensus)는 이 병목을 영지식 증명(ZK proof)으로 해결한다. 수십만 개의 투표를 하나의 작은 증명으로 압축할 수 있게 되면, 모든 밸리데이터가 매 블록 투표하고 그 자리에서 집계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를 통해 최종적으로 한 번의 투표 라운드로 확정을 끝내는 1라운드 최종성(1-round finality)을 목표로 한다.
새 블록이 만들어지는 주기인 블록타임도 짧아진다. 지금 이더리움은 12초마다 새 블록을 만든다. 이 12초는 블록을 만든 노드가 블록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 밸리데이터들이 그 블록에 투표하고, 그 투표를 모으는 세 단계에 각각 4초씩 배정한 시간이다.
이는 2020년 PoS이더리움의 합의 레이어인 비콘 체인 설계 당시 가정용 컴퓨터와 느린 회선을 기준으로 보수적으로 잡은 여유분인데, 그 사이 클라이언트 소프트웨어와 글로벌 네트워크 환경이 개선되어 실제로는 각 단계가 훨씬 일찍 끝난다는 것이 확인됐다. 이를 기반으로 2027~28년경 블록타임 12초를 6초로 줄이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 이후 2029~2030년경 계획된 린 합의에서는 블록과 투표를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퍼뜨리는 차세대 P2P 프로토콜을 도입해 4초까지 단축한다.
블록타임이 4초가 되면 트랜잭션을 보내고 실행되기까지의 대기 시간이 평균 2초 안팎으로 줄어든다. 여기에 최종성 단축이 더해지면, 트랜잭션을 보내고, 실행되고,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되는 전 과정을 수 초 안에 끝낼 수 있게 된다.
밸리데이터가 되기 위한 최소 요건을 지금의 32ETH에서 1ETH로 낮추는 것도 린 합의의 목표 중 하나다. 밸리데이터 참여 요건이 낮아지면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네트워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5년 뒤의 이더리움은 더 빠르고, 동시에 더 많은 사람이 직접 합의에 참여하는 더 탈중앙화 된 네트워크를 목표로 하는 것이다.
Gigagas L1: 초당 10억 가스 처리량
두 번째 북극성은 처리량이다. 가스(gas)는 이더리움의 연산량을 측정하는 단위다. 지금 이더리움 L1의 처리량은 초당 약 500만 가스인데, 이를 초당 10억 가스(Gigagas)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이더리움 메인넷의 처리량을 지금보다 200배 가량 증가시키겠다는 것이다.
이 목표의 가장 큰 걸림돌은 블록체인의 기본 검증 구조인 재실행에 있다. 현재 이더리움에서 새 블록이 만들어지면, 전 세계 수천 개의 노드가 그 블록 안의 모든 트랜잭션을 각자 처음부터 다시 실행해본다. 반에서 한 명이 문제를 풀면 나머지 전원이 같은 문제를 처음부터 다시 풀어서 답을 맞춰보는 셈이다. 이는 탈중앙 네트워크를 신뢰할 수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동시에 네트워크의 탈중앙성과 확장성을 동시에 달성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기도 하다. 누구나 노드를 돌릴 수 있게 하려면 처리량을 낮게 유지해야 하고, 처리량을 올리려면 소수의 고성능 노드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핵심 기술도 영지식 증명이다. 블록을 만든 노드가 "이 블록에 포함된 트랜잭션 실행 결과는 전부 올바르다"는 수학적 증거를 함께 제출하면, 나머지 노드들은 트랜잭션을 다시 실행해서 검증하는 대신 그 증거가 올바른지만 확인하면 된다. 증명을 검증하는 일은 모바일 기기에서도 가능할 만큼 가볍다. 이더리움 L1의 블록 검증에 이 방식을 적용하는 것이 L1 zkEVM이고, 이더리움 재단은 2026년 2월 이를 위한 공식 로드맵을 발표했다.
스트로맵에 따르면 처음에는 기존의 재실행 방식과 영지식 증명을 병행하는 선택적 증명 단계를 거친다. 이후 2028~29년경에는 증명 하나만으로 블록을 검증하는 의무적 증명 단계로 넘어간다. 이후에는 블록에 트랜잭션이 아무리 많이 담겨도 검증 부담이 늘어나지 않는다. 가스 한도를 계속 올릴 수 있는 근거가 생기는 것이고, 초당 10억 가스까지 한도를 늘리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또한 사용자 입장에서 외부 RPC를 신뢰하지 않고도 개인 월렛이 설치된 환경(스마트폰, 웹 브라우저)에서도 체인 전체를 직접 검증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검증의 영역에서 탈중앙성을 넘어 궁극적인 탈신뢰(trustless)를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Teragas L2: 무수한 롤업을 위한 데이터 고속도로
세 번째 북극성은 L2를 위한 것이다. L2(롤업)는 트랜잭션을 이더리움 본체 바깥에서 실행하고, 그 결과 데이터만 L1에 기록해 보안을 상속받는 체인이다. 이때 데이터를 L1에 저장하기 위한 전용 공간이 블롭(blob)이고, 블롭의 총량이 곧 L2 전체가 낼 수 있는 처리량의 상한이 된다.
2025년 12월의 푸사카 하드포크에서 PeerDAS라는 기술로 각 노드가 블롭 데이터의 일부만 나눠서 검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블롭 수를 크게 늘릴 수 있는 기반을 깔았고, 이후 글램스터담에는 블롭을 처리하는 네트워크와 저장을 더 효율화하는 개선들이 후보로 올라와 있다. 스트로맵은 이 데이터 용량을 매년 꾸준히 늘려 최종적으로 초당 1기가바이트, 즉 테라가스(teragas)급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한다. 이는 고화질 영화 한 편 분량의 데이터가 몇 초마다 하나씩 이더리움 네트워크 위에서 움직이는 용량이다.
이 로드맵을 통해 이더리움의 분업 구조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사실 모든 로드맵이 완성된다 하더라도 이더리움 L1의 처리량이 솔라나와 같은 고처리량 체인을 넘어서는 것은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다. 그 정도의 성능을 요구하는 애플리케이션들은 자체 L2을 통해 이더리움에 온보딩하게 된다.
실제로 로빈후드(Robinhood)는 토큰화 주식을 다루기 위한 자체 이더리움 L2인 로빈후드 체인을 런칭했다. 이더리움의 보안은 그대로 상속받으면서, 규제 대응과 같은 자신들의 요구사항은 자체 체인에서 해결하는 방식이다.
즉, 5년 뒤의 이더리움은 최종 정산과 보안을 책임지는 L1과, 각자의 용도에 맞게 최적화된 L2들이 공존하는 거대한 정산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Post Quantum L1: 양자 컴퓨팅에도 안전한 이더리움
네 번째 북극성은 양자 저항이다. 지금 이더리움의 서명 체계(지갑의 ECDSA, 밸리데이터의 BLS)는 충분히 큰 양자 컴퓨터 앞에서 깨진다. 미국 국립표준기술연구소(NIST)는 현행 서명 방식인 ECDSA를 2030년부터 사용 중단 권고, 2035년부터 금지할 것을 예고했고, 구글은 자체 시스템의 양자 내성 전환 시한을 2029년으로 계획하고 있다. 이더리움의 암호를 깰 수 있는 양자 기술의 등장 시점이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이더리움의 양자 대응의 주요한 목표는 서명 체계를 양자 내성을 갖춘 해시 기반 암호(hash-based cryptography)로 교체하는 것이다. 해시 기반 서명은 양자 내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영지식 증명과도 궁합이 좋아서, 앞의 gigagas L1에도 관련있는 업그레이드다. 이더리움 재단은 2026년 1월 전담 포스트 퀀텀(PQ) 팀을 꾸리고 해시 함수 보안 검증에 100만달러 상금을 걸었다.
스트로맵에서 이 전환은 여러 포크에 걸쳐 진행된다. 양자 내성 공개키를 미리 등록해두는 단계에서 시작해, 밸리데이터의 증명과 서명, 트랜잭션과 데이터 계층까지 차례로 해시 기반으로 바뀌고, 2029년경 해시 기반 L1이라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목표대로 잘 진행 된다면 이더리움은 다가올 양자 컴퓨팅 시대에도 안전한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Private L1: 기본값이 되는 프라이버시
마지막 북극성은 지금까지의 이더리움에 없던 것이다. 현재 이더리움의 모든 거래는 전 세계에 투명하게 공개된다. 주소만 알면 누구든 그 계정의 잔고와 모든 송금 내역을 볼 수 있다. 개인에게는 사생활의 문제가 될 수 있고, 급여나 거래처 대금을 온체인으로 처리하려는 기업에게는 블록체인 도입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
private L1의 목표인 실드 전송(shielded transfers)은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엽서 같은 지금의 트랜잭션을 봉투에 넣는 일이다.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금액을 가리면서도, 그 거래가 규칙을 지켰다는 사실을 영지식 증명으로 네트워크에 증명한다. 영지식 증명은 이처럼 이더리움의 모든 로드맵에 걸쳐 있는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
스트로맵에 따르면 프라이버시를 위한 기초 작업이 이르면 헤고타(Hegotá) 하드포크에서 적용될 예정이며, 트랜잭션이 블록에 담기기 전 대기 단계에서부터 내용을 암호화하는 멤풀 개선이 다음 업그레이드로 이어진다. 다만 프라이버시 관련 로드맵은 스트로맵의 북극성들 중에서 가장 구체적이지 않다. 규제 환경에도 민감한 영역이기 때문에 달성 여부가 가장 모호한 목표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이더리움이 처음으로 L1 레벨의 프라이버시를 공식 로드맵의 목표로 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마치며: 4년 뒤의 이더리움
다섯 개의 북극성 각각을 한 줄씩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fast L1: 최종성이 15분에서 몇 초로, 블록타임은 12초에서 최종적으로 4초까지 줄어든다.
- gigagas L1: 재실행이 영지식 증명으로 대체되어 L1이 초당 10억 가스, 지금의 약 200배를 처리한다.
- teragas L2: L2를 위한 데이터 용량이 초당 1기가바이트까지 늘어나, 많은 L2들이 그 위에서 돌아갈 수 있다.
- post quantum L1: 서명 체계가 해시 기반 암호로 교체되어 양자 컴퓨팅 시대에도 안전해진다.
- private L1: 거래의 내용을 가리면서도 유효성은 증명하는 프라이버시가 이더리움의 기본 기능이 된다.
이 로드맵을 이끄는 주체도 이전과는 달라지고 있다. 이더리움 재단은 최근 전체 인력의 약 20%를 줄이며 역할을 점차 줄여가고 있고, 그 빈 자리를 새로운 조직들이 채우고 있다. 2026년 6월에는 이더리움 DAT 기업들과 이더리움 공동창업자 조셉 루빈(Joseph Lubin)이 후원하는 비영리 연구개발 조직 이더랩스(Ethlabs)가, 일주일 뒤에는 재단의 엔터프라이즈 팀 출신들이 설립한 이더리움 인스티튜셔널(Ethereum Institutional)이 출범했다. 앞으로의 이더리움은 작은 재단과 다양한 주체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완전한 오픈소스에 가까운 네트워크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로드맵이 계획대로 완성된다는 보장은 없다. 앞서 말했듯 스트로맵은 확정된 로드맵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는 초안이고, 당장 다음번 하드포크인 글램스터담만 해도 2026년 상반기 목표에서 하반기로 연기되었다. 일정은 밀릴 수 있고, 암호 기술들은 검증의 시간을 더 필요로 하며, 무엇을 어느 하드포크에 포함시킬지는 연구자들과 커뮤니티의 논의를 거치며 계속 바뀔 것이다.
어떤 모습이 될 것이든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더리움이 전 세계에서 가장 중립적이고 탈 신뢰적인 컴퓨팅 네트워크로서 꾸준히 자리할 것이라는 점이다. 스트로맵은 이더리움이 이러한 정체성을 버리지 않으면서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안전한 네트워크가 되겠다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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